블로그2026년 9월 4일
12년 일했는데 내 지식은 다 어디로 갔을까?
우리는 배움이 부족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경험이 부족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정보가 부족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조언이 부족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부족한 건 질서입니다.
이 글은 2026년 9월 4일에 르코&렉스 레터로 보낸 글입니다. 글 속 신청 안내와 일정은 보낸 날 기준입니다.

공감가는 글을 링크드인에서 읽었습니다. 이렇게 시작하는 글이었습니다.
❝
커리어를 설명하는 일이 점점 어려워졌다.
막상 면접 준비를 해보니, 무엇을 했는지는 이력서에 남아 있어도 그 과정에서 무엇을 고민했고, 왜 그런 결정을 했으며, 무엇을 배웠는지는 생각보다 많이 잊고 있더라고요. 기록하지 않으면 결국 ‘무엇을 했다’는 사실만 남고, 그 경험을 통해 얻었던 생각은 조금씩 사라지는 것 같습니다.
에스더 강 님의 링크드인 발췌
그녀는 이것을 경험의 감가상각이라고 불렀습니다.
기록을 시작한 그녀의 글을 읽어보면 경력을 하나씩 복기하면서 서로 무관해 보이던 경험 사이에서 반복되는 자기만의 패턴을 찾습니다. 기록하자는 흔한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인풋 중독, 다양한 경험이 지금 얼마나 뼈아픈지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배움이 부족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경험이 부족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정보가 부족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조언이 부족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부족한 건, 경험의 감가상각을 방어할뿐만 아니라 가치를 만들어 낼 “질서”입니다.
성공하진 못했지만 배움은 남기자
2021년 8월, 5번째 창업이 실패로 돌아갔고 불가피한 안식년을 얻었습니다. 코로나와 싸우느라 빚이 남아 있었습니다. 0to1은 밥 먹듯 했지만, 벌인 일을 정리하고 다시 출발선에 서는 1to0은 서툴렀습니다. 이대로라면 안식년이 아니라 불안식년이 될 것 같았습니다.
코로나를 만나 금의환향하지 못한 12년 창업가의 삶, 나에게 주는 졸업장 같은 것이 있으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명분은 이랬습니다.
“그래, 성공은 못했지만 배움은 남기자. 그래야 다음 시도의 성공 확률이 높아지니까.”
단물이 다 빠져버린 20대 후반까지 거슬러 오르며 채굴을 시작합니다. 먼지를 털어내듯 외장하드의 폴더를 열어 파일을 일일이 읽었습니다. 눈이 지치면 산책을 나가서 뇌 구석구석 짱박혀 있던 생각들을 꺼냈고요.
그러길 한 3개월쯤 지났을까요. 자료를 채굴을 하던 어느 순간, 서로 상관없어 보이던 일들 사이에서 같은 패턴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꽤 비슷한 문제들에 집착했고
전혀 다른 분야지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접근법은 대동소이했으며
매번 막혀서 좌절한 곳들이 멍청할만큼 비슷했으나
그래도 중요한 의사결정을 내릴 때 꽤 일관된 원칙이 있었습니다.
경험 사이에 선을 긋자 나타난 관점
그때부터 자료와 생각을 정리하는 방식이 달라졌습니다. 예전에는 했던 일을 시간순으로 늘어놓았습니다. 언제 창업했고, 무엇을 만들었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적었습니다. 사실 이건 연대기에 가깝습니다. 이제는 발견한 패턴을 중심으로 속성값을 부여하고 과거를 다시 배열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어떤 문제를 중요하다고 보았나
그 문제를 왜 그렇게 정의했나
무엇을 기준으로 선택했나
실제로 무엇을 했나
어떤 성과가 나왔나
무엇이 예상과 달랐나
다른 상황에서도 다시 쓸 수 있는 것은 뭔가

시간이 지나면서 점처럼 흩어져 있던 경험 사이에 선이 생겼습니다. 이게 요즘 소위 말하는 지식 그래프였더군요. 물론 그때는 제게 옵시디언도, AI도 없었습니다. 여튼 인과 관계가 생기자 과거의 사건은 다음 판단에 재사용할 수 있는 지식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더해서 제게 세상을 보는 렌즈 하나가 생겼습니다.
바로 관점입니다.

마치 안경 도수 조정하기 위해 끼는 이 안경처럼, 안보이던 게 보이는데 아직은 어질어질하고 쓴 모양새도 우스꽝스러운 그런 상태였습니다.
렌즈가 생기자 신이 나서 책을 읽기 시작합니다.
예전에 책을 읽을 때는 좋은 문장에 밑줄을 긋거나 어디가서 아는체 하려고 남의 주장을 이해하려 애썼습니다. 읽은 내용은 책 안에 있었고 경험은 제 기억 안에 있었습니다. 외부 세상과 내부 경험이 만나지 않은 것입니다.
렌즈가 생기자 책이 달리 보입니다. 저자의 말이 제 경험을 설명해주는 근거인지, 제 생각과 충돌하는 반례인지, 제가 미처 보지 못한 빈칸인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놀라운 건 내가 뭘 모르고 있는지도 몰랐는데 그걸 깨닫게 됐다는 것. 꽤 흥분됐던 기억이 납니다.
자연과학서부터 경영서까지 닥치는 대로 읽었습니다. 이틀에 한 권꼴로 읽고, 읽은 뒤에는 반드시 독후감을 썼습니다.
새로운 지식이 들어올 때마다 이미 만들어둔 선 위에 붙었습니다. 점이 아니라 선에 붙였습니다. 맞는 것은 근거가 되었고, 맞지 않는 것은 관점의 한계를 알려주었습니다. 제 지식은 넓어졌고, 생각에는 점점 경계와 구조가 생겼습니다.
점: 경험
선: 지식
면: 이론
그러자 나만의 이론을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의 테제, 그러니까 제가 증명하고 싶은 중심 명제를 정했습니다. 그 아래에 제 생각과 경험, 판단과 성과, 외부의 근거와 반례를 다시 배열했습니다. 부족한 근거는 책과 논문을 뒤져서 붙였습니다. 지금은 딸깍이지만 그땐 도서관을 매일 출퇴근해야 했습니다. 일주일에 한편 정도의 글을 쓸수 있었고 그걸 브런치에 올렸습니다. 스무편쯤 되니까 묶을수 있게 됐고 묶고 나니 책을 출간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흩어진 경험을 정리하다 보니 관점이 나타났고 → 그 관점으로 세상을 다시 배우다 보니 이론이 생겼고 → 그 이론을 설명할 수 있는 형태로 묶다 보니 책이 된 것
책이 졸업장일거라 생각했는데 책이 되기까지 정리한 지식이 진짜 졸업장이자 다음을 위한 이력서였습니다.
우리는 경험을 성장이라고 착각합니다.
우리 사회는 “다양한 경험”을 신봉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두 단어가 붙어서 클리셰가 되어 버렸죠. 다양한 경험은 지식이 될 원료를 많이 갖는 것 뿐 당연하게도 성장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외려 통제할 필요가 있습니다. 경험은 필연적으로 돈, 시간, 에너지를 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양한 경험이 아니라 “어떤 경험을 할 것인가?”라고 묻는 것이 좋습니다.
그럼 경험이 성장이 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경험 → 해석 → 연결 → 일반화 → 지식 → 재사용 → 성장
경험을 재사용 가능한 지식으로 바꿔야 성장합니다. 이 과정을 거치지 않은 경험은 기억으로 남습니다. 대뇌에 무질서하게 저장된 기억은 필요할 때 꺼내 쓰기 어려워 결국 추억에 머뭅니다. 젊은 시절 그 비싼 비용을 치룬 경험이 “라떼는 말이야”로 남게 되는 것이죠.
경험 → 기억 → 추억 → 꼰대
경험 → 지식 → 성장 → 권위
기억을 꺼내 쓰는 비용은 나이가 들수록 비싸집니다. 10대 때야 교과서 페이지까지 기억하면서 잽싸게 기억 꺼내와서 시험을 칠수 있지만 마흔이 넘어서 뇌가 절전모드에 들어가지 않으면 걸을 때 발을 평소처럼 다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돌부리에 걸리게 됩니다.
경험이 재사용 가능한 지식으로 저장되어 있지 않으면 매번 어디에 있는지 찾고, 당시의 맥락을 복원하고, 지금 상황에 맞는지 다시 판단해야 합니다. 그렇게 들이는 기억 추출&콘텐스트 형성 비용이 그 기억으로 만들어 낼수 있는 임팩트보다 커지면 뇌는 과거의 경험을 더이상 꺼내지 않고 매번 새롭게 시작합니다.
직관과 감각에 의존해서요.
그럼 전에 했던 실수를 다시 하고, 이미 내렸던 판단을 또 고민하고, 이미 만들었던 방법을 다시 만듭니다. 경력은 늘어나는데 새 일을 만날 때마다 신입처럼 제로베이스에서 시작합니다. 종종 감이 좋은 사람들이 있죠.
감좋은 사람은 성공 방정식이 하나뿐인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 방정식으로 2번 이상(반복된 실력이라고 믿게 됨) 성과를 내서 얻은 타이틀이죠. 다만 이런 워커는 방정식만 따르고 나머지는 모두 감으로 하기 때문에 협업이 어렵고 새로운 문제를 해결할수 없습니다. 즉, 감으로 일하는 건 학습 루프가 작동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경험은 시간으로 열거되지만 지식은 인과로 엮입니다. 그 인과를 강화하는 것이 바로 “학습”입니다.
12년을 돌아보고 책을 내기까지 2년 정도가 걸렸습니다. 그동안 제가 한 일을 한마디로 말하면 “기억에 질서를 부여하는 일”이었습니다. 나만의 이론과 지식그래프를 만든 이 시간이 저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었다고 느낍니다.
100개를 한번씩 찍먹하던 제가, 1가지를 100번 반복하는 엔진이 붙으면서 새로운 챕터가 열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걸 매일 할 수 있다면?
누구나 지난 10년을 정리하기 위해 안식년을 갖고, 2년 동안 책을 읽고 글을 쓸 수는 없습니다. 퇴사 뒤나 인생의 전환점에 회고를 몰아서 하는 대신, 일하는 동안 매일 할 수 있다면 어떨까요?
오늘 끝낸 일에서 성과와 판단을 꺼내고 실패한 일에서는 다시 하지 않을 방법과 아직 유효한 배움을 분리하며 반복해서 사용한 순서는 방법론으로 만들고, 새로운 근거는 기존 생각을 강화하거나 수정하는 곳에 연결합니다.
그러면 내 경험은 잘 정렬된 지식 서랍에 차곡차곡 쌓입니다. 필요한 순간에 바로 꺼내 쓸 수 있는 질문과 판단의 서랍입니다.
새로운 성과와 판단은 다시 알맞은 서랍을 찾아 들어갑니다. 기존 생각과 맞지 않는 경험이 들어오면 새로운 서랍을 만들거나 서랍의 이름을 바꿉니다. 일이 하나 끝날 때마다 지식이 늘어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지식을 분류하는 관점까지 업그레이드됩니다. 그렇게 되면 오늘 한 경험이 내일의 판단을 낫게 만듭니다.
“이 학습 루프를 매일 돌릴수 있다면 어떨까? 경험과 학습에 쓴 내 시간과 비용이 가시적인 성장으로 보여지고 그것이 경제적 가치로 리턴되는 질서, OS를 만들수 있다면 우리는 다른 차원의 일과 삶을 살게 되지 않을까?”
이 질문의 답을 내고 있습니다. 검증 막바지입니다.
이 OS, 납작하게 말하면 돈버는 시스템이지만 만약 당신이 이것을 가장 끝단까지 사용한다면 종국에는 Work&Life Blend 상태에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렉스님과 저는 20년이상 워라블로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AI사회는 이것을 모든 개인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AI가 주는 유익함 중 하나일 것입니다. 워크와 라이프를 따로 떼어두는 데서 비극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둘은 35만년 전부터 섞여 있었습니다.
친구가 제게 물었습니다. “경험을 왜 해야할까? 경험은 대체 뭘까?”
제가 말했습니다. “경험은 다음 경험을 결정해”
과거는 미래를 만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