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지중지하는 고슴도치 조카가 있습니다. 올해 14살이고 경기도 외곽지 산 중턱에 살며 대안 교육을 받아요. 미식 영재인가 싶을 정도로 식재료와 요리에 관심이 많으며 특히 빵과 치즈를 좋아합니다. 틈만 나면 책을 읽고 글쓰기도 썩 잘하는 아이예요.
조카와 주말 아침에 베이커리 카페를 찾았습니다.
“OO이는 빵을 좋아하잖아. 그럼 지금 빵집 한번 해볼래?” 제가 농반진반 물었습니다.
“글쎄, 좋아하는 건 맞는데 어떻게 해?”
빵을 좋아하는 14살 조카가 ‘지금’ 빵집을 준비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써보겠습니다.
#1
2009년으로 기억합니다. 압구정에 <르알래스카>라는 프랑스식 빵집이 문을 열었습니다. 학교가 근처에 있어 자주 방문했던 빵집입니다. 가게에 들어서면 ‘르코르동블루’ 졸업증서가 걸려있고 프랑스에서 공수해 온 밀가루 포대가 바닥에 턱턱 쌓여 있습니다. 믿을만한 보증서, 졸업장과 ‘빵 하면 프랑스’라는 편견이 강하게 작동한 걸까요. 빵이 유난히 맛있었습니다.

이후 가로수길에서 프랑스, 동경의 제과제빵학교 졸업장이 걸린 빵집이 빠르게 늘어납니다. 카페거리의 조상인 가로수길을 시작으로 삼청동, 분당 정자동, 부암동, 경리단길 등등 대한민국 전역으로 유사한 빵집들이 전파되었죠.
맛이 상향 평준화되고 SNS 인증 문화가 자리 잡으면서 ‘맛집'의 경쟁력이 ‘맛’에 있지 않은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맛은 취향이라 절대적인 경쟁력이 되긴 어렵습니다. 맛있는 건 기본이고 뭘로 사람들을 오게 할수 있을까요? 상속세 낮추려고 큰 돈 들여 지은 대형 카페는 예외로 할게요.
#2
카페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20년 넘게 <농협>으로 사용되던 건물에 들어선 “사계생활”입니다. 카페 입구가 재밌습니다. ATM기가 있던 자리에 기계를 빼내고 사람이 출입할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주문하는 곳에는 번호 알림 표지판이 있습니다. 내가 주문한 음료가 나오면 은행창구처럼 가서 음료를 받아 오도록 되어 있죠. 이처럼 사계생활은 기존 은행의 공간/기물 중 카페의 사용자 경험에 유사하게 활용될 수 있는 것들은 그대로 남겨두는 방법으로 과거의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공간 한편에는 은행 민원 서식지를 넣어두는 곳에 입출금요청서 대신에 사계리 여행 지도가 엽서 형태로 들어 있습니다. 사계리의 여행지를 소개하는 것뿐 아닙니다. 로컬 식재료로 다이닝을 선보이기도 하고 지역 작가들의 전시도 열립니다. ‘사계리와 농협'이 가진 이야기 유산을 기반으로 모든 상품과 콘텐츠를 전개하죠.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려면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야기를 만든다고 다 이야깃거리가 되지 않습니다만 <사계생활>의 사례처럼 이야기가 무궁무진하게 쌓여 있는 공간이라면, 그 유산을 잘 이어받으면 오픈하는 날부터 이야깃거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야기 유산에는 권리금도 없죠. 몇 년간 지속됐던 뉴트로 열풍, 지역의 도시재생사업 활성화, 그리고 가깝게는 을지로가 단숨에 힙지로가 된 배경에는 ‘이야기 유산'이 있습니다.
이야기 유산이 ‘공간’에만 적용될까요. ‘사람’에게도 있습니다. 하나의 관심사를 일관되게 꾸준히 파온 사람을 우리는 ‘덕후'라고 부릅니다. PC방 드나들던 게임덕후는 프로 게이머가 되고, 평생 레고를 만들면서 온갖 핍박을 들었던 어른아이는 레고의 제품 디자이너가 됩니다.
덕후의 외골수적 '기질'은 이제 세상이 필요로 하는 '역량'이 되어 돈으로 전환되거나 콘텐츠가 되어 미디어의 조명을 받기도 합니다.
돈을 들이면 때깔 좋은 콘텐츠가 나옵니다만 시간을 들이면 복제불가능한 콘텐츠가 나옵니다. 덕후라는 콘텐츠는 돈으로 찍어낼수가 없죠.
#3
"오늘부터 네가 먹고 싶은 빵이 생각나면 그때마다 그림으로 남겨보면 어때? 그림 옆에 재료 이름과 맛의 특징, 날짜도 써보는 거지."
조카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습니다. 당장 돈을 투자해서 가게를 구하고 인테리어를 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 하나씩 기록하는 거예요. 베이킹도 하는 조카가 서른에 빵집을 차린 다고 하면 16년간 남긴 기록이 5,000여 장이 되고 직접 만들어 본 빵이 약 800 개가 됩니다. 창업하기도 전에 책이 서너 권, 레시피는 연구할 필요도 없이 800개 중 '재밌는 스토리가 있는 레시피'를 고르기만 하면 됩니다. 블로그와 SNS에 이 기록을 매일 올리면? 장담컨대 ‘고슴도치 빵집 열어요’라고만 올려도 오픈 날에 손님이 줄을 설 것입니다.
<사계생활>이 은행의 20년짜리 이야기 유산을 물려받았다면 14살의 조카가 30살의 조카에게 16년짜리 이야기 유산을 물려주는 것입니다.
하나의 관심사가 시간의 세례를 받으면 이야기가 되고 이야기가 확장되면 세계관이 됩니다. 앞으로 팔리는 건 상품이 아니라 세계관입니다.
#4
서울 사는 옥순씨는 평소 슬로우 라이프에 관심이 있어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블로그를 통해 알게 된 사람이 한 명 있습니다. SNS도 팔로우합니다. 그녀는 14살 때부터 빵과 식재료에 관심이 많아 동년배 친구들은 학원 뺑뺑이 돌고 있을 나이에 자기가 좋아하는 일에 꿋꿋이 시간을 쏟습니다. 그녀가 어린 시절 그림으로 남긴 빵 레시피는 지금 봐도 너무 먹음직스럽고 창의적이기까지 합니다. 빵과 식재료에 대한 콘텐츠를 보기 위해 블로그를 들여다보기도 하지만 그녀의 생각, 선택, 삶의 태도에 위로와 대리만족을 얻기도 합니다.
어느 날 그동안의 기록을 모은 독립출판물을 냈다는 소식을 알게 됩니다. 작은 서점에서 저자와의 대화가 이벤트로 준비되어 있다고 해서 직접 찾아가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수년간 SNS, 블로그, 책으로 그녀의 빵과 라이프스타일을 흠모하던 어느 날, 그녀가 경기도 외곽의 한적한 마을에 작은 빵집을 연다는 소식을 알립니다.
#5
공간 비즈니스는 크게 쪼개면 2가지의 해결입니다. ‘뭘 만들어서, 어떻게 오게 만들 것인가’입니다. 이것이 공급자 입장에서 생각한 것입니다. 일의 순서 상, 만드는 것이 먼저고 손님을 불러들이는 것을 그다음이기 때문이죠. 고객은 일의 순서에 아무런 관심이 없으니 해결할 2가지 문제의 순서를 바꿔 보겠습니다. ‘누구를 오게 하기 위해 무엇을 만들 것인가’. 문장에 인과관계가 생기고 아이템보다 고객이 ‘와야 할 이유 Reason Why’가 중요해집니다.

옥순씨는 조카가 문을 연 빵집(조카와 '고슴도치 빵집'이라고 부르기로 했습니다)에 ‘가야 할 이유’가 분명합니다. 수년간 팔로우하며 조카의 세계관을 동경하기 때문에 방문합니다. 빵 맛도 궁금할 텐데 그건 ‘명분’입니다. 가기전부터 맛을 확신할 것입니다.
자, 이제 돈을 태워 SNS에 ‘마케팅'을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저 초대하면 될 일입니다.
#6
조카는 빵이 먹고 싶어지면 엄마에게 빵을 구워달라고 합니다. 조카의 니즈를 충족시켜 줄 사람은 엄마가 유일합니다. 가장 맛있는 빵을 무료로 편리하게 제공하기 때문이죠. 어른이 되면 아마도 ‘엄마'대신에 ‘빵집'에게, ‘요청’이 아니라 ‘구매'를 하게 될 텐데요. 필요가 있어 구매를 하게 되는 것이죠.
근데 집밖으로 나오면 선택지가 매우 다양합니다. 빵집이 다양한 것뿐 아니라 배고픔을 해결할 수단이 무한대로 늘어납니다. 중요한 건 먹어야 할 이유도 다양해진다는 사실입니다.
배고파서, 카페에서 친구를 만나려고, 스트레스받아서, SNS 하다가 예뻐 보여서, 아는 분 집에 가는데 빈 손으로 가기 뭐해서… 등등 돈 쓸 이유가 무궁무진한 세상에 던져집니다. 이 때는 이유가 있어 구매를 하게 됩니다. 필요가 있어 구매할 때는 상품이 중요한데 이유가 있어 구매할 때, 상품은 단지 명분에 불과합니다.
빵집이니까 마땅히 빵을 팝니다만 옥순씨는 세계관에 초대받고 싶어서 빵집을 방문하는 것이고 빵은 30살의 조카와 옥순씨를 연결하는 ‘구실’을 할 뿐입니다. 빵이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14살 때부터 빵이 좋아서 시작한 일이고 시간이 지나면서 애착도 기술도 더해져 누구보다 잘 만든다는 자부심도 생길 것입니다. 그건 그것대로 잘해야 하지만 아쉽게도 세상에는 조카보다 더 맛있는 빵을 만드는 사람도, 더 멋진 공간도, 더 싸게 파는 가게도 많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14살 때부터 쌓아 온 조카의 이야기 유산은 세상에서 계속 유일하며 값어치를 고객이 스스로 매겨 먼 길 마다하지 않고 찾아오게 하는 강력한 무기입니다.
따라서 팔아야 하는 건 오늘 만든 빵이 아니라 16년 간의 기록이 만든 유일무이한 세계관입니다.
(3년 전 작성한 글이에요. 조카는 저의 제안을 받아들이진 않았지만, 될성부른 떡잎에서 무궁무성한 나무로 자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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